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쵸소카베 모토치카 (문단 편집) == 기타 == 묘지인 쵸소카베의 표기는 長宗我部와 長曽我部의 두가지가 보이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히데요시]] 등이 長曽我部를 사용한 반면 모토치카 본인과 [[쵸소카베 모리치카|모리치카]]는 長宗我部를 사용하였다. 이렇기에 옛날에는 최고 통치자가 사용했던 長曽我部 측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으나 현재는 쵸소카베가가 본부로 하였던 지역의 이름이 소가베(宗我部)였던 것과 학자들의 의견 개진에 영향을 받아 長宗我部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長宗我部元親と四国(2014,吉川弘文館)p.20] 여러모로 소설에 의해 이미지에 피해를 입은 장군 중 한 명. 히메와코라는 별명으로 졸지에 왜소하고 소심한 미청년으로 그려지기 시작했으며, 노부치카 사후에 '''사랑하는 후계자를 잃어버려 미쳐린 광인''' 포지션을 받아 그의 이미지를 정말 엄청나게 비판하고 깍아내렸다. 비록 후계자 지정 과정에서 많은 가신들을 학살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노부치카 사후에 이루어진 통치 흔적이 연구의 과반을 점하는 느낌으로, 1587년부터 1590년까지 4년에 걸쳐 이루어진, 도요토미기 켄치의 영향을 받아 실행한 모토치카의 켄치 흔적은 전술했듯 쵸소카베치켄쵸라는 이름으로 현존하고 있다. 야마우치 일족의 토사번이 대대로 보관, 필사하여 지금에 이르렀다고 하며 국가 중요문화재로도 등록되어있다. 다른 쿠니의 도요토미기 켄치와는 달리 상당히 세세하고도 정밀하게 기록한 것이 포인트. 1596년 8월에는 우라도에 [[스페인]]의 교역선, 산 펠리페호(サンㆍフェリペ号)가 표류됐던 사건이 있었다. 알고보니 선 펠리페호는 [[마닐라]]로부터 [[멕시코]]로 향하던 중 폭풍을 만나 배가 거의 망가져버리는 바람에 가까스로 일본에 정박했다고 하며 이를 본 치카나오는 모토치카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도 연락을 하자고 주장하였고 곧 이 소식은 히데요시의 귀에도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직전에 일어난 진도 8급 대지진으로 인해 소모된 지출을 만회한답시고 돈을 벌 기회가 생겼다며 좋아하면서 그 스페인 교역선을 공격하여 뺏으려 하는데, 몇년전 내린 '배의 화물을 함부로 뺏지 말라'는 명령과 충돌하지 않는답시고 신부 추방령을 꺼내들어서 스페인 산 펠리페호를 공격하여 배의 화물들을 약탈해서 가져간 다음, 스페인의 [[일본 26위 성인|신자들을 잡아서 잔인하게 학살하기 시작한다.]] 11월에는 분코쿠법[* 分国法, 한자로 분국법이라 읽으며 [[다이묘]]가 자신의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지정한 법령이다.] 쵸소카베 모토치카 100개조(長宗我部元親百箇条)를 만들어 다음 년 3월에 실시하였다고 한다. 내용으로는 절, [[진쟈]]의 보호와 규정, 황실과 도요토미 일족의 카몬(家紋)을 쓰지 말 것, 사적인 사사로운 싸움이나 말싸움은 엄히 다스릴것, '''[[음주|과음]]을 하지 말 것''', '''남자가 밖에 전쟁하러 나갈때 여자는 집에 남자를 들이지 말고 자신이 밖으로 나가지 말 것''' 등이 기재되어 있다. 흔히 모토치카의 토리키리역으로 [[아케치 미츠히데]]가 유명하지만 [[하시바 히데요시]]와 [[미요시 야스나가]]도 후반에 와서 모토치카와 외교활동을 펼쳤다. 현대에 와서 모토치카가 시코쿠 평정을 위해 토사에서 아와까지 진군한 산길을 간접체험할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는데 바로 [[도산선]]을 타는 것이다. 모토치카의 군세는 오보케 고보케를 넘어갔다고 기록하고 있고 열차선 반대편으로 시코쿠 평정의 중앙거점으로 쓰였던 하쿠치 성터를 볼수가 있기에 거의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실제로 도산선의 [[고치현|코치]]까지 가는 노선을 타보면 에메랄드 빛 요시노가와의 협곡, 험난한 산길을 거쳐 거의 2시간 40분을 달려야 도착할 정도로 지세가 매우 험난하다. 그가 시코쿠 정복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했다고 하는 운펜지는 시코쿠 88개소(八十八ヵ所) 중에서 66번째의 [[절(불교)|절]]로 지정되어 있으며 약 900M의 산꼭대기에 위치하고 있다. 일반인도 편하게 올라갈수 있도록 로프웨이를 설치해 놓았기에 [[카가와현]] [[칸온지]] 시에서 로프웨이를 타고 직접 방문해 볼수 있다. ~~하지만 로프웨이까지 가는 길이 헬이다.~~ 임진왜란 참전 장군답게 많은 조선인들을 강제로 전쟁포로로 연행해 왔다. 대표적인 예가 '박호인'이라는 조선인 기술자인데, 임진왜란 때 쵸소카베가의 군인들에게 전쟁포로로 잡혀 끌려 왔다. 여기서 살면서 그는 의료기술이나 두부제조법 등 많은 조선의 기술문화들을 전래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 [[아키츠키 타네노부]]는 쵸소카베 가문을 섬기게 되기도 하였고, 아키츠키 가문은 대대로 두부를 만들게 된다. 또한 그의 영지였던 지금의 고치 지역에는 역시 임진왜란 때 끌려온 조선 여인이 길쌈하는 법을 알려줬다고 하며 그녀의 무덤은 '조선국녀의 묘(朝鮮国女之墓)'라 해서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모토치카의 가신 오타니 요쥬로(小谷与十郎) 끌고온 것인데, 그녀를 마음에 들어해 자기 아들과 혼인하길 권했으나 조선국녀는 '나는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갈 몸'이라 거부했고 결국 독신으로, 고국에 돌아가지 못한 채 한 많은 삶을 일본에서 마치고 말았다. 현재 남아있는 그녀의 비문은 요쥬로의 증손자가 세운 것]. 모토치카가 시코쿠 통일의 근거지로 사용했던 [[오코 성터]]는 현재 [[http://www.kochi-bunkazaidan.or.jp/~rekimin/okou/castle-k.html|코치현립 역사민속자료관]]이 설치되어 있으며[* [[한국어]] 팜플렛이 있다!] 성터는 역사 유적으로 잘 정비되어 남아있다. [[고치역(고치)|코치역]]에서 버스를 타면 약 30분 정도 지나서 도착할 수 있을 정도로 [[고치시]]내에서 꽤나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성터 자체가 공원 비슷하게 정비되어 있고 목재로 만든 건물들은 철거되어 있지만, 흙으로 만든 토루이나 카라보리(空堀), 타테보리(竪堀)가 온전히 남아 있고 안내판도 설치되어 있어 유적에 대해 [[일본어]]로 자세히 설명되어 있는 데다, 센고쿠 다이묘의 본성 치고는 상당히 소~중규모의 성터이기 때문에 중세 [[일본의 성]]에 관심을 가지려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성터가 되겠다.~~단점이 있다면 시골 특유의 지옥같은 버스 배차 시간...~~ 그 외에는 강 상류에서 이축시켜 온 옛 민가와 [[카가와 치카카즈]]의 묘소가 만들어져 있다. 성우 [[소가베 카즈유키]]는 그의 후손이라고 한다.[* [[쵸소카베 모리치카|모리치카]]의 카이에키 이후, 쵸소카베의 말예들 중 일부는 자신들의 옛 성인 소가베로 바꾸어 생활하였다고 한다. 때문에 지금 일본에서는 소카베와 쵸소카베가 모두 쓰이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